직(이는구)조
we(ird we)aving
우리는 모두 하나의 껍질을 입고 살아간다. 피부와 옷, 얼굴과 이름, 그리고 마음 깊은 곳에 지층처럼 쌓인 비교의 껍질까지. 껍질은 나와 세계 사이에 경계를 긋지만, 동시에 세계와 내가 서로에게 닿는 유일한 표면이기도 하다. 이 전시는 껍질을 벗겨내야 할 껍데기가 아니라, 살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바뀌는 ‘두 번째 피부’로 바라본다.
미학은 오랫동안 표면과 본질을 둘로 나눈 뒤, 표면이 본질을 속이는지를 물어왔다. 한반도의 조형은 그 물음 이전에 서 있다. 거친 회색 태토 위에 백토를 발라 분을 칠한 분청사기는 제 화장을 숨기지 않는다. 위장이 스스로 위장임을 선언하면서 아름다워지는 자리에서, 표면과 구조를 가르는 법정은 무력해진다.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경로의 문제다.
껍질은 세 겹의 생태 안에서 작동한다. 세 층위는 나란히 놓인 항목이 아니라, 서로를 먹여 살리며 순환하는 하나의 계(系)다.
물질의 껍질 — 환경적 생태
흙과 옻, 색과 직조는 구조에 덧붙은 장식이 아니라 구조를 비로소 존재하게 하는 원리다. 문어가 피부 속 돌기 근육만으로 질감 자체를 고쳐 쓰듯, 옻칠은 수십 번 겹쳐 오르고 갈리며 표면이 아니라 두께가 된다. 물질의 껍질은 자연과 인간, 시간과 기술이 접속해 만들어낸 살아 있는 구조다.
관계의 껍질 — 사회적 생태
얼굴과 옷은 우리가 누구인지 드러내는 동시에 감춘다. 그러나 하회탈은 벗어야 할 가면이 아니었다. 얼굴을 지운 자만이 양반을 조롱할 수 있었으니, 그것은 써야 비로소 말할 수 있게 되는 가면이었다. 껍질은 사회가 우리에게 씌우는 것이면서, 내가 나를 지키고 드러내기 위해 스스로 고르는 것이기도 하다.
태도의 껍질 — 정신적 생태
악보는 껍질이다. 같은 악보를 눈으로 보되 손끝으로 어루만지듯 풀어내는 연주자처럼, 반복하고 익히고 변형하는 동안 껍질은 나만의 방식이 된다. 스타일이란 주어진 형식을 끝내 자기 것으로 소화해낸 태도의 이름이다.
모든 껍질은 결국 흙으로 돌아간다. 흙은 다시 생명을 품고, 그 생명은 또 다른 껍질을 짓는다. 껍질을 벗는 일은 나를 지우는 일이 아니라 다음의 나를 짓는 일이다.
안과 밖이 서로의 호흡이 되는 자리, 그 하나의 표면을 여기에 엮었다.
예술이 빚어낸 위장술로.
세 겹의 생태는 펠릭스 가타리 『세 가지 생태학』(1989), 표면이 구조를 존재하게 한다는 관점은 젬퍼의 피복 원리, 위장을 세계와의 협상으로 읽는 시각은 로제 카이와 「Mimétisme et psychasthénie légendaire 의태와 전설적 정신쇠약」(『미노토르』 7호, 1935; 『신화와 인간』 1938 재수록)에서 빌렸다.